수리섬영도

"영도가 간직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시 바라보고 소중하게 기록합니다."

영도의 예술가, 서성찬(1906~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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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봉미 독립기획자 작성일 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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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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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 55x68.5cm 캔버스에 유채, 1958,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변화무쌍하고 힘 있는

영도의 기질을 닮은 화가 서성찬



어릴 적 나에게 영도는, 할매 귀신이 무서워 밤에 사람들이 이사를 한다는 별난 곳이었다. 섬이지만 부산이고, 부산인데 섬인, 조금은 특이한 곳으로 여기며 살았다. 최근 몇 년간 일 때문에 영도에 자주 오가게 되면서 영도는 나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바뀌었다.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물양장(간이 부두)과 마주치게 되고 낮에는 선박이 즐비한 곳에 낚시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밤이 되면 반고흐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의 풍경을 품고 있는 곳. 영도는 이질적이지만 삶의 매력이 물씬 묻어나는 곳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영도에 대한 글을 의뢰받았을 때, 그런 영도의 변화무쌍한 기질을 가지고 새로운 시선으로 정물화를 그린 화가, 서성찬이 떠올랐다.


 

서성찬(1906~1958)은 영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술과는 전혀 관계없는 상업실 수교를 졸업하고 큰 양복점에 들어가 양복 재능 기술을 배워 점원으로 일했다. 서성찬은 그때 배운 양복 기술을 50여 세 만년까지 가지고 있었다. 기술을 배워 돈을 저축하며 평범하게 살던 서성찬에게 그림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된 사건이 생겼는데, 어느 해 봄에 용두산에서 부산항을 사생하는 화가를 지켜보게 된 것이었다. 아마 그는 그 화가를 빤히 바라보다, 가슴속 깊은 곳에 자신도 모르게 숨어있던 그림을 향한 열정을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기록에 의하면, 드라마틱하게 바로 양복점을 관둔 것은 아니었다. 19391112일 발간된 일본어판 <부산일보>에 제9회 부산미술전람회 특집 화필을 힘차게 움직일 인물로 서성찬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양복점 일을 하는 생업의 바쁜 와중에도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평범한 양복점 점원에서,

국전 11회 연속 특전 수상 작가가 되다



생업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그림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던 열정적인 서성찬은 몇 해 뒤 저축한 돈을 가지고 동경의 가와바다 양화 연구소에 들어가게 된다. 연구소 소장이었던 후지다 쯔구시 화백은 악명 높기로 유명했는데, 2주에 한 번씩 나와 학생들의 그림을 살폈다. 서성찬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한 번은 쯔구시 화백이 그의 그림을 힐끗 보며 지나가자 서성찬은 달려가 자신의 그림을 봐 달라고 간청했다. 쯔구시는 서성찬의 그림을 슬쩍 보고는 별안간 짧은 지팡이를 집어 들고 그의 그림을 후려쳤다. 이에 크게 실망한 서성찬은 더욱 이를 악물고 난폭한 지도 속에서 3년을 더 버티고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뒤, 국전에 참여한 서성찬은 한 해도 빠짐없이 연속 11년 동안 화가 최대의 영예인 특선을 수상했다.




부산 최초의 서양화 그룹, 토벽



1953년 부산 피란수도 시절, 서성찬은 토박이라는 의미를 담은 토벽을 김영교, 김윤민, 김종식, 김경과 함께 결성해 제1<토벽 동인전>(1953.3.22.~29, 다방 르넷쌍스)를 개최했다. 토벽 동인은 부산 최초의 서양화 그룹으로 지역의 근대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결성했던 동인이다. 부산은 밀려온 피란민들로 혼란했고 생활고와 불안한 전시 상황이 이어졌지만, 미술가들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부산에서 195011월부터 195312월까지 31개월 동안 무려 107회의 미전(美展)이 열렸다. 1945년에서 1950년의 4년간 34회의 미전이 열린 것에 비교하면 피란 시기 화가들의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피란 시기 유입된 화가들의 활발한 활동에 자극을 받아 창립된 것이 토벽 동인이었다. 그러나 토벽 동인은 그들이 풍기는 서구식 그림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토벽 동인은 모두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미술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흐름에 맞서 부산의 위치에서 마음으로 마주한 그림을 그리고자 <토벽 동인전>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1회 팸플릿의 인사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회화라는 것이 한 개의 손끝으로 나타난 기교의 장난이 아니요

엄숙하고도 진지한 행동의 반영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예술이란 것이 부박한 유행성을 띄운 것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닐진대

그것은 필경 새로운 자기 인식 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여기에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생리적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허식 없고 진실한 민족미술의 원형을 생각한다.


1회 토벽동인 1953.3.22. 다방 르넷상쓰



제 1회 토벽동인전 리플릿

제 1회 토벽동인전 리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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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제 1회 토벽동인전 리플릿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토벽 동인은 서구미술의 무분별한 겉핥기식 그림을 지양하고 내면을 자각한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겉치레가 아닌 참된 민족의 원형을 생각하고 그것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 토벽 동인의 움직임이다. 토벽 동인은 부산미술문화 정체성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했다. 1<토벽 동인전>에 참여한 서성찬은 <벌레 소리>, <양남 풍경>, <전원 모색> 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토벽 동인전은 그 후 2번의 전시를 더 개최하고 막을 내린다. (서성찬은 1회 창립전만 참여하였다).




서성찬은 7여 년의 경남여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등산할 때 그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면 일행에게 인사도 없이 도중에 내려가 화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는 주로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소재의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제자 박대련의 구술 기록 중 재밌는 일화가 있다. 서성찬이 남항 바닷가에서 램프와 망태를 들고 그 위에 불가사리, 고등어를 갖다 얹고 광선을 관찰하며 바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광선이 달라지면 아침에 나가 다시 그리고, 또 광선이 바뀌면 다 싸잡아 집 앞뜰에 널어놓고 그렸다고 한다. 고등어가 썩어서 냄새가 진동할 때까지 치우지 않고 그렸는데, 서성찬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제자는 냄새에 코를 잡으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고등어가 싱싱할 때 그 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금까지 기억한다고 한다.


가면 있는 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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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있는 정물>, 60.5x73cm 캔버스에 유채, 1956,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서성찬은 임호, 정원일과 술을 먹고 셋이서 함께 귀가하다 19581024일 영도다리 위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영도에서 태어난 그가, 영도다리 위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영도다리 위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달이 참 밝다였다. 이 짧은 한마디에서 자유로운 화면 구도와 독특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변화무쌍하고 힘 있는 영도의 기질을 닮은 화가 서성찬, 일생에 단 한 차례 <서성찬 서양화 개인전(1955 11 14~19일 부산 미국공보원 전시장)>으로 열었지만, 작품은 파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라며, 주변 사람에게 작품을 나눠주었던 화가. 애정과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로 우리는 서성찬을 기억할 것이다








* 故 서성찬 작가 유족께 작품 이미지 사용을 허락 받았습니다.

 


이봉미 독립기획자

서양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부산 중구 영주동에서 예술공간 영주맨션 관리자 겸 독립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예술로서 내가 원하는 것, 필요한 것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어쩌면 개인의 고민에서 시작되었지만 기획을 통해 확장되고 공유되는 지점에 매력을 느껴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미술#기획#전시#공유#소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