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시섬

"문화예술이 어떻게 도시의 미래가 되는지, 다양한 전문가들이 이야기합니다."

로컬 문화의 보고(寶庫), 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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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재환 부산연구원 사회문화연구실장 작성일 2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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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우리 삶의 토대이자 생활양식이다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힘이며시민의 행복한 일상과 조화로운 공동체를 일구는 밑거름이다.”



2020년 11월 공포한 '부산시민문화헌장'에 담겨있는 문화에 대한 정의다. 지역 중심의 문화 분권과 시민 주도의 문화 주권을 선언한 것으로 시민들의 일상적 삶과 공동체를 만드는 뿌리가 문화임을 강조하고 있다지속가능한 삶을 일구어내는 중심축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근래 도시재생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로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이유는 간단하다지금 살고 있는 공간의 가치를 창조적으로 활용해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서다로컬의 창조성과 지속가능한 삶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지역민들의 문화적 역량을 모아 창조성을 발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로컬 문화의 보고 영도이제는 문화적 관점으로 영도를 바라보고 함께 그 문화적 자산과 로컬 창조의 추동력에 주목해 본다.


해양도시 부산의 기원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도과거 영도는 내륙과 단절된 도심 속의 섬고립되고 소외된 섬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영도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영도의 지형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숙명론이 그 일례다선사시대 아치섬이 동삼동과 육지로 연결되어 영도의 지형은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학의 형상이었다 한다그러다 학의 왼쪽 날개에 해당하는 아치섬과 동삼동이 바다로 인해 분리되어 날개가 잘려 나간 형국이 되어 영도가 번창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속설이 퍼져나갔고그렇게 영도는 오랜 세월 변방의 섬으로만 남겨졌었다.

 



영도 조도, 아치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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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조도 / 아치섬





그러나 이제 영도는 창조적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는 문화도시로 새로운 비상을 꿈꾸고 있다. 아니 이미 날갯짓을 시작했다. 벼랑 끝 절경이 아름다운 마을로만 알려졌던 흰여울마을은 풍광 좋은 마을에서 문화마을로 거듭났으며, 조선소 아지매들의 힘찬 망치질이 울려 퍼졌던 일터마을은 깡깡이 예술마을로 변모해 영도의 핫플레이스로 조명 받고 있다.  





영도의 혁신적인 변화들은 로컬로서의 영도가 가진 문화적 잠재력이 창조적 역량으로 분출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도의 잠재력, 그리고 그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전환적 발상과 실천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주목해야 한다. 영도의 변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를 꿈꾸면 현재를 꾸리고 있는 영도의 여정, 해양도시 부산의 축소판인 영도의 행보에서 부산 문화의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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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여울마을



흰여울마을




영도. 태생적 혼종성 그리고 문화적 확산



영도는 조선시대 공도정책으로 무인도였다가 조선 말엽부터 외지인들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곳이다. 고종 18년 외국 선박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 절영진을 설치하였는데, 일반인의 거주는 이를 전후한 시기로 약 300호 정도가 정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말엽 그렇게 새로이 삶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한 영도는 사실 부산 내륙에 비해 그 역사가 길지 않은 곳이다. 초기 이주민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천혜의 어장을 찾았던 어민들뿐만 아니라 병인박해를 피해 영도를 찾았던 이들도 있었다 한다.  

 

개항 이후 영도에는 일본인 이주어촌이 들어섰고, 제주도 출향 해녀의 근거지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공간인 배후 공업지로 조성되었다. 일본인과 제주 해녀가 찾아들고 수산조선 산업의 기지로 변화하기 시작한 영도. 광복 후에는 귀환동포들과 한국전쟁기에는 피란민들이, 그리고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농촌이주민들까지 유입되었고 이들의 문화가 융합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영도의 형성과정이 그러하듯 영도의 문화는 태생적 혼종성이 내재되어 있는 부산 문화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영도에는 켜켜이 쌓인 이주민들의 문화가 지금도 여전히 생활 문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찾았던 이들이 세운 최초의 성당인 청학성당,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제일 영도교회, 그리고 민속신앙의 전통과 동학의 근거지였다는 기억들, 그 외 원불교, 천리교 등 다양한 종교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1900년대 초 도자기, 제지, 양초 등 제조업 공장과 장류와 주조장 등 근대 산업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 조선업, 철공업, 철강업 등 중공업 시설들도 들어서면서 영도는 산업 공간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특히 1887년 다나카 조선소를 시작으로 대평동에 10개 이상의 조선소가 생겼고, 이후 조선 산업은 부산 경제를 이끌던 원동력이 되었다. 산업 공간으로서의 변모하기 시작한 영도는 거칠지만 역동적인 해양 문화를 형성하면서 다양한 문화 스펙트럼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도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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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제주도 이주민이 가장 많았던 곳이 영도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출향 해녀들로 시작해 어선, 원양어선, 선원, 수산물 판매업자, 어망공장, 조선소 등등에 주로 근무하면서 정착해 왔다. 영도 주민 1/3이 제주도에서 건너온 이주민이다. 그래서 부산에서 유일하게 제주은행과 제주도민회관 부산지부 건물이 있다. 제주도와 영도의 관계성은 비단 기록된 역사와 가시화된 공간을 넘어 기억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신선동 아씨당 신화 속에서도, 해안가 해녀촌에서도, 그리고 장터에 자리 잡고 있는 제주도 순대인 수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해방 후 귀환동포, 한국전쟁기 피란민들의 삶의 애환이 뒤섞이기 시작한 영도는 또 다른 문화의 결을 형성해 나가기도 했다. 봉래동 물양장 부근의 대한도기에만 피란민 3,165명이 기거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영선동과 청학동의 해돋이 마을은 피란민들의 삶이 이어져 내려왔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물류수송을 위해 조성된 영도다리는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디아스포라가 묻어 있는 상징물이 되었다산업화 시기 조선 산업이 호황기를 맞으면서 영도의 봉래시장과 남항시장 주변은 돈과 사람이 넘쳐나 도심 속 번화가보다 더 활기찬 공간이 되었다. 영도의 아침을 깨웠던 대한조선공사 직원들의 안전화와 도시락 소리를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했던 영도의 공간성, 영도 곳곳에는 제각기 사연을 안고 영도를 찾았던 이들의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다. 식민성과 근대성의 혼합, 개항, 전쟁, 산업화를 거치면서 다른 문화가 뒤섞이면서 정체성의 이중성, 경계성, 중간성이 혼재한 혼종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영도의 혼종성, 영도의 역사가 배태한 그들 문화의 태생적 특징이 아닐까 싶다.




 영도. 공동체 문화의 뿌리를 간직한 곳



다양한 공간성과 그에 따른 문화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영도에는 오랜 세월 영도를 지켜온 사람들의 공동체 문화가 남아 있다. ‘행복한 일상과 공동체 의식의 밑거름이 되는 그들만의 공동체 문화가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조선 시대 말엽 영도에 정착하기 시작한 이들의 삶과 문화를 온전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4, 5대에 걸쳐 영도를 지키고 있는 토박이들의 공동체 문화는 제한적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선사시대 사람이 살았던 곳이자, 절영진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한 동삼동은 영선동과 더불어 영도 마을 중 상대적으로 일찍 형성되었던 마을이다. 동삼동에는 마을 주민들의 모임으로 일리회(一里會)’서발토박이회가 있다. 일리회의 경우 과거에는 마을 토박이들만 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마을에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자격 기준이 완화되어 토박이 외 마을에 40~50년 이상 거주한 주민이면 가입이 가능하고, 서발토박이회는 10여 년 전에 결성된 모임으로 일리회 회원과 겸하는 이들이 많으나 대체로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리회가 언제 결성된 모임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대략 1940년대 초 동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결성된 대동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제강점기 일제가 대동계를 해체하려 하자 명칭을 일리회로 바꾼 것이다. 과거 일리회는 마을의 질서를 유지해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근래에는 당산제를 계승하고 마을의 화합과 친목 도모에 역점을 두고 있다.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인 토박이들의 모임과 활동은 지속가능한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 추동력이 되고 있다.

 

축제의 시대다. 그러나 사실 현대사회 많은 지역의 축제들 속에서 진정한 공동체 정신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케임은 축제는 신성한 종교 행위의 사회적 표현으로, 축제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대사회에서 재창조되는 축제들 속에서 동삼1동에서 시작된 달집태우기 행사는 지속가능한 공동체 축제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된다. 동삼1동 달집태우기 행사는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마을 청년회 회원들이 정월 대보름날 밤 바닷가에 모여 모닥불을 피워 놓고 놀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달집태우기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하여 1999년부터 마을 축제로 거행하기 시작하여 점차 영도의 대표적인 정월대보름 축제로 20여 년간 추진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단위 축제도 여럿 있다. 영도지역의 주민 자발적 축제들은 일상의 행복과 공동체 의식의 밑거름으로 자리매김해 오고 있다.



달집태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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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태우기

 




영도에는 봉래산 영도 할매 신앙과 관련하여 영도를 떠나면 3년 안에 망한다.’는 속신이 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떠나는 사람들을 붙들어 세우거나 떠났던 사람들을 되돌아오게 하는 묘한 힘이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속신은 디오니소스적 감정 공동체가 지닌 신성한 집합적 경험을 통해 공동체의 소속감을 형성하는 지식 체계에 다름 아니다. 영도의 주산인 봉래산을 지키며 영도 주민들을 품 안에 끌어안고 있는 영도 할매의 신격화된 질서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영도만의 독특한 문화적 현상이다. 영도 할매 속신은 신앙을 넘어 영도의 공동체 문화를 이끄는 또 다른 밑거름이라 할 것이다.

 

영도 토박이들이 일구어낸 공동체 의식과 신화적 질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도만의 소중한 자산으로 지역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배가시키는 문화적 추동력이 되고 있다.




영도 문화의 속살, 희망의 도시로 이끌다

 


영도하면 누구나 태종대를 먼저 떠올린다. 신라시대 태종무열왕이 왜구 토벌을 위한 활쏘기 장소였다고 이름 붙여진 곳이 태종대이다. 조선시대까지 군사적 요충지이자 기우제를 지냈던 성역으로 자리했던 태종대는 긴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간직한 영도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태종대는 1969년 유원지로 지정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 잡았지만, 한때는 생을 마감하기 위해 찾아든 이들이 많아 자살바위라는 어두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생을 마감하려 찾아온 이들의 발길을 돌리기 위해 바위 옆에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는 푯말을 세우고, 구명사(求命寺)를 짓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살바위의 어두운 그림자는 전망대를 설치하고 모자조각상을 건립하면서 서서히 걷혔다. 모자조각상은 생명의 근원인 모성 나아가 대자연이 가진 여성성의 상징을 통해 자살바위를 자연 그대로의 바위로 되돌려 놓았다.




태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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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지금도 신화적 위력을 간직하고 있는 봉래산 영도 할매, 대자연의 이미지로 지친 삶을 위로하는 태종대 모자상, 그리고 자갈치 아지매, 재첩국 아지매와 함께 오늘의 부산을 이끈 부산의 3대 아지매로 부상한 깡깡이 아지매. 이들에서 잉태된 영도 문화의 속살은 근원을 탐색하고, 다양한 삶을 포용하고, 조화를 추구하는 여성성의 본질적 특성과 맞닿아 있다. 영도가 지닌 여성성이야말로 다양한 이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들만의 문화를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필자가 끌어안고 있는 새로운 화두다.

 

로컬 문화의 보고(寶庫), 영도. 문화도시로 도약하는 영도의 변화를 보면서 문화가 있는 도시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미래 부산 문화의 밑그림을 함께 그리며.

 







오재환 부산연구원 사회문화연구실장

문화정책연구자
부산연구원에서 문화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문화의 사회적 가치가 널리 퍼지기를 기대하며 창작-매개-소비의 문화생태계를 고민하면서 살고 있다. 정책연구라는 다소 딱딱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상의 탈출(?)을 꿈꾸기도 한다.